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왜곡/채널A (문단 편집) === 38곳의 무기고가 시민군에 의해 4시간 만에 탈취된 것은 간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채널A/채널A사진6.jpg]] >김광현 : 또 중요한 문제라서 한번 더 여쭤보겠습니다. 그, 무기고를, 에, 약 38군데를 이제 5시간 만에. >서석구 : 4시간 만에. 그리고 또 17군데에. >김광현 : 동시에 한 겁니까, 순차적으로 한 겁니까. >서석구 : 그러니깐, 4시간 만에 동시다발로 했겠죠. 동시다발로, 4시간 만에, 동시다발로. 그저, 4시간 만에 17군데에 산재돼있는 38개의 무기고를 탈취를 했는데, 에, 이 무기고 위치를, 첩보를, 미리, 이, 저, 저희들이 갖고 있는, 이, 저, 탈북자들의 자료에 의하면, 미리 간첩들이 3개월 간에 거쳐서 거, 전남에 흩어져있는, 각 지역에 흩어져있는, 무기고 위치를, 다 첩보를, 받아 가지고, 에 그 간첩들이 첩보를 받아가지고, 이 그 간첩들이 첩보를 받아가지고, 북한 특수부대가 내려와가지고 쳤기 때문에 삽시간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 아래는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 중 시민군의 무기고 탈취와 관련한 부분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연합뉴스. 1995.「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 탈취는 19일 오후 3시 15분께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밤 11시께 광주세무서 방화, 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오후 1시께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 나주 등 지방의 지, 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 즉 당시 광주 시민들은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 또는 근처 방위 상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것이다. 특히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에,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무기고에 보관되고 있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013822|#]][* 연합뉴스. 2000. 「'예비군 무기고' 철거놓고 경찰-군 갈등」] 실제 1973년에 서울에서 벌어진 [[구로동 카빈 강도사건]]의 범인들도 예비군무기고에서 카빈소총 3정을 절취해 강도살인에 이용한 실례가 있다. 이 파출소들과 방위 산업체가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인 옛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확인해보라.] 이를 "군사적 기밀 장소" 라는 수사를 이용해서 포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11일 하루 안에 무기고가 탈취당했다는 주장도 틀렸다. 전교사 작전일지의 5월 22일자 기록에는 목포 연동지서무기고 및 목포경찰서 무기고 피복창고가 탈취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http://blog.naver.com/chiyahn/20187316168|스캔본]][* 말 편집부, <광주진압계엄군의 작전일지>, 『말』, 1988년 8월, 26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